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양간비금도                                                

 

 

 

널리 불리는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었다.

그 당시 여성이 이름 · 호 · 자를 고루 갖춘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바로 여성으로서 대우를 그만큼 받았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명망이 높았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었다.

그녀는 위로 오빠 허성(許筬), 허봉(許)을 두었다.

두 오빠도 중요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고,

동생 허균도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사의 기질을 보여 촉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허씨 집안을 모두 부러워했고 3허(三許)니 4허(四許)니 일컬으며 형제 시인으로 꼽았다.

 

열 살이 좀 넘어 이달에게 시를 배운 뒤 그녀의 재질은 장안에 소문이 났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치, 그리고 뛰어난 시재는 바로 그런 명성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신동으로 일컬어졌고

서울 양가의 딸들은 그녀와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안동 김씨 집안의 남편을 맞이했다.

그런데 남편 김성립은 어지간히 변변치 못했던 모양이다.

과거 공부를 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었고 더욱이 아내와 시를 주고받을 수준도 안 되어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화락하지도 못했다.

여기에다 아내에 대한 열등감이 쌓여 걸핏하면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술에 곤드레가 되어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큰 불행을 맞이했다.

두 자식이 채 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해를 연이어 죽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딸과 아들의 무덤을 자신이 사는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다.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쓰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 무덤은 광주 지월리의 달을 보고 밤을 지키며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녀의 불행은 계속 꼬리를 이었다.

남편의 방탕은 조금도 쉴 줄을 몰랐다.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넘치던 친정집에도 풍파가 연달아 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했고 이어 오라버니 허봉은 이이의 잘못을 들어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금화 생창역에서 아버지처럼 객사하고 말았다.

이런 친정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고,

자신의 시재를 알아주었던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다.

그러다가 한번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엥? 이거 2017년 얘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