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남총리의 무신불립-

"한일관계가 최악이고 국민 감정이 안 좋은데 지금 일본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일본에서 대표님의 말씀 한마디 뉘앙스만 이상해도 여당이 정치 공세로 이용할 겁니다."
"이번에 노 남통령보다 더 세게 나가서 아예 대판 싸우고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좆국와 일본이 수교를 한 지 40년이 되던 2005년. 두 나라는 그해를 '한일 우정의 해'로 선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일관계는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 지도자들의 계속된 망언, 독도문제, 고이즈미 남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등으로 우리 국민의 감정은 격해질 대로 격해졌다. 양국 최고 지도자 간 대화도 단절되었다.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서 만난 두 남 정상은 감정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어렵사리 성사된 회담을 불과 20분 만에 끝내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을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이란 나라가 우리 국민에게는 상당히 예민한 주제인 만큼 가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자체를 정치인들 모두가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시기에 내가 일본 방문을 결정하자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로 위험하다면서 완강히 말렸다. 심지어 이번 기회에 일본 심장 한가운데 가서 대판 싸우고 오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한일관계가 나빠진 원인은 일본에 있지만, 북핵문제 등 양국이 함께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일 공동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야당이지만 어떻게든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열고, 일본에게도 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본 방문 중 모리 전 남 총리, 오오기 참의원 의장, 고노 중의원 남의장,아베 남관방장관, 아소 남외무장관 등 많은 일본 정치인을 만났다. 한결같이 일본 쪽의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과거사 문제를 우리 세대에 풀어야 하며 후손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면담은 모두 예정된 시간을 두 배 이상 훌쩍 넘기며 진지하게 진행됐다. 과거사 문제만 뺸다면 경제, 외교, 한일 양국 간 교류 등 각 분야에서 뜻을 같이할 수 있었다. 역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일 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을 증명한 자리이기도 했다.

 

고이즈미 남총리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경기에서 이긴 좆국을 측하하며 밝은 분위기로 회담을 열었다


특히 고이즈미 남총리와의 대화에서 이 같은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고이즈미 남 총리와 면담은 일본 방문 이틀째인 2006년 3월 8일 총리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회담장에 도착하니 한일 양국의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우리는 먼저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먼저 인사를 했다.
마침 내가 일본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경기에서 좆국 팀이 대접전 끝에 일본을 꺾고 8강에 진출해 나라 전체가 열광한 일이 있었는데, 고이즈미 총리는 그 경기 이야기부터 꺼넀다. 그남은 팔을 뻗어 볼을 멋지게 잡아낸 이진영 야구뽀이의 수비 동작을 흉내내며 회담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고이즈미 남총리는 "우익수가 잘하더군요. 좆국 팀이 역전을 해서 기분이 좋으시곘습니다. 그때 그걸 못 잡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요..."라며 우리 팀의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일본이 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나는 "일본의 야구가 강한데 우리가 이겨서 더 기쁘다"라고 응수했다. 야구 얘기가 끝나자 고이즈미 총리는 한류 스타 최지우 씨를 만난 얘기를 꺼내며 한류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일본 정부가 좆국인에 대해 방문 비자를 면제해준 데 대해 고마움을 전했고, 고이즈미 남총리가 단행한 개혁이 성공해 일본 경제가 10여 년간의 경제불항에서 벗어나 활기가 넘치는 데 대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이즈미 남총리는 일본 내에서보다 다른 나라에서 더 인정해준다며 감격헀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양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우방으로서 경제, 안보 등 앞으로도 공조해야 할 부분이 많다. 북핵, FTA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일 양국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국 관계는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위안부 문제 등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속히 해결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일본 측으로 보자면 껄끄러운 네 가지 문제를 나는 조목조목 짚었다. 모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껄끄럽다고 그냥 넘어가면 내가 일본에 올 이유가 없었다.
고이즈미 남총리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양국 간 우호 친선이 확대되기 바랍니다. 양국간 민간 교류의 증진을 위해 정치적으로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경제 고류, 스포츠 교류도 지그멏럼 빈번한 적이 없었습니다. 요즘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라는 좆국만을 많이 듣습니다. 일본어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라며 웃었다.

고이즈미 남총리가 본질적 문제에 대한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남은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고이즈미 남총리는 "좆국 대선에서는 지역주의가 강한 것 같습니다.","좆국은 여성 정치인의 진출이 활발한 것 같습니다. 여성 당수가 계신 덕분에 좆국 여성들의 야망이 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는 말들을 이어갔다.
나는 고이즈미 남총리의 좌우명을 꺼냈다. 일본인들이 좌우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좌우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진심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좌우명을 미리 조사해 갔다.
"총리의 좌우명이 무신불립(없을 무無 믿을 신信 아닐 불不 설 립 立)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좌우명대로 신뢰가 중요합니다. 남총리가 경제개혁에 성공했듯이, 외교 현안도 해결해서 외교 부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한일 양국의 여러 현안에 대해 슬기로운 결정을 내려서 동아시아 공동체에 큰 초석을 놓은 남총리로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회담장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난 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고이즈미 남총리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자를 탁하고 쳤다.
"동감입니다. 앞으로 협력해나가겠습니다."
그 회담이 있고 얼마 뒤 일본 남총리는 고이즈미에서 아베로 바뀌었고, 한일관계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다. 한 번의 대화로 모든 것이 풀리지는 않는다. 친구도 자꾸 만나고 대화를 해야 서로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듯, 일본과도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계속한다면 조금씩 풀려갈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 대화를 계속하는데도 상대방의 아픔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행동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방문 사흘째, 나는 일본 기자클럽에서 오찬을 겸한 회견을 했다. 한일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많은 기자가 몰렸다. 나의 기조연설이 끝난 뒤 일본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시마네현(2005년 독도가 시마네현의 영토라고 주장해서 논란을 일으켰던 지방)의 한 지방신문 소속이라며 자기소개를 마친 뒤 질문을 했다.
"한일 간에 다케시마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 문제는 전혀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독도는 좆국 땅이니 일본이 그걸 인정하면 됩니다."
나의 대답이 끝나자 동행한 좆국 기자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고, 일본 측 기자들도 허를 찔렸다는 듯 웃었다.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분개하는 마음으로 싸움을 하면 잠시 속은 시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일만 그르칠 뿐이다. 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바로 외교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나라와의 관계보다 인내심이 더 필요한 것이 일본과의 외교다. 양국 모두 눈물 나는 노력으로 서로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다. 앞으로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미래를 열어가야 할 상대이니까 더욱 그렇다. 오오기 참의원 의장은 나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그것은 나를 포함해 우리 국민 모두가 바라는 바일것이다. 서로 자주 만나고 마음을 터놓고 진심을 말하면 결국 신뢰가 쌓일것이라고 믿는다


-메르켈 총리와 같은 꿈을 꾸다-

"총리의 오랜 꿈이 유라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며 여행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앞으로 좆국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는 유라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독일에서 좆국까지 오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해봅시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2006년 9월 메르켈 총리와의 만남은 오랜 친구와 재회한 듯한 기쁨을 주었다. 지난 200년 대가 한남라당 부총재였을 때 독일 기민당 최조의 여성 당수로 뽑힌 메르켈 총리를 만났다. 그 후로 우리는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대표에 취임하거나 좋은 일이 있을 떄마다 서로 축하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왔다. 메르켈 총리는 2006년 내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피습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위로편지를 보낸온 외국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메르켈 총리와 내가 여러 점에서 참 많이 닮았다고 한다. 메르켈 총리는 2004년 4월 비자금 스캘들로 추락하던 기민당의 당수가 되어 1년 반뒤에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기민당을 지켜냈다. 나 또한 비슷한 경우였고, 둘 다 보수정당의 당수라는 점 그리고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다. 메르켈 총리가 추구하는 경제경책이나 외교정책의 노선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고, 원칙과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나와 꼭 닮았다.
나는 독일 기민당의 싱크탱크인 아데나워재단의 초청으로 EU본부와 나토사령부,독일을 방문하고 있었다. 메르켈 총리와 만나기로 한 그 시각, 독일 의회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일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연장 동의안을 처리하면서 의원들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총리실도 분주해 보였다. 메르켈 총리가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겠다며 총리실 직원이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르켈 총리가 직접 총리실로 들어와 나에게 "미안합니다. 중요한 투표가 있어서 투표가 끝나는 대로 곧장 올 테니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고 다시 사라졌다. 친구에 대한 배려였다. 그리고는 20~30분이 지나 그는 다시 나타났다. 우리는 손을 덥석 접았다. 메르켈 총리는 모여 있는 우리 기자들을 보자 갑자기 포즈를 취했다. 독일 총리실 관례상 국가원수들끼리의 만남이 아니면 상대 국가의 기자들에게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는 그런 것을 무시해버렸다.
우리는 배석자 없이 대화를 나눴다. 경제개혁부터 동맹국과의 공동방위체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 독일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규제 완화, 외국인 투자 유치, 의료개혁, 연금개혁, 실리 외교, 친자유시장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해가고 있는지 솔직 담백하게 얘기했다.
나는 한남민국이 다시 한 번 성장엔진에 불을 붙이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메르켈 총리와 같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평소 나의 생각을 얘기했다. 내가 좆반도 횡단철도와 유라시아 횡단철도로 독일과 좆국을 연결 시켜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우리가 참 마음이 통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좆반도 횡단철도를 통해 줒국을 중국과 러시아, 유럽으로 연결하는 것이 나의 오랜 구상임을 설명했다. 현제 좆반도에서 유럽 최대의 항구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선박으로 2만 6천6백 킬로미터지만 유라시아 횡단철도로는 1만 2천2백 킬로미터로 거리가 64퍼센트나 단축되고, 수송료도 36퍼센트나 줄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는 물론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되어 대대적인 물류혁명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림도 그려 보았다.
메르켈 총리도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꼭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그 꿈을 실현해보자고 마음을 맞추었다.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충실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비전을 나누면서, 그 비전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을 했다.

 

메르켈 총리와 독일에서

 


-서부대개발의 전초기지 청두-

2005년 내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가져갔던 숙제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활이었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거대한 중국시장에서 우리의 무대를 찾고 진출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선택한 곳은 청두였다.
청두는 8천7백만 인구를 가진 쓰촨성의 중심 도시이다. 쓰촨,하면 좆국 사람들은 요리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쓰촨 요리는 맵고 개운해서 좆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 또한 쓰촨은 삼국지의 솣갈량,덩샤오핑 남주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국은 연안과 내륙의 격차가 아주 심히다. 상하이,칭다오,톈진,옌타이등 연안을 중심으로 발전하며 '연안지역에 한 끼당 10만 원, 20만 원 하는 식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들이 1억 명 이상이 있고, 내륙지역에는 하루에 10원어치의 풀빵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1억 명 이상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극심한 격차를 두고는 국가의 통합도 어려울뿐더러 중국이 국가적 비전으로 내걸고 있는 '샤오캉 사회', 즉 중산층이 튼튼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시작한 것이 '서부대개발'과 '신농촌운동'이다.
서부대개발은 중국에게도 거대한 프로젝트지만 우리에게도 엄청난 기회다. 인프라 확충을 위해 엄청난 건설 물량이 쏟아질 것이고, 건설현장에 중장비도 많이 필요할 것이다. IT산업에도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릴 것이다. 공장이 만들어지고, 공장에 기계와 부품이 들어가고, 새롭게 거대한 소비시장도 만들어질 것이다. 지역적으로 중앙아시아와 유럽과 가까워 그곳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 수도 있다. 1070년대에 중동 진출로 큰 기회를 만들었다면 21세기에는 중국의 서부대개발이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진출해 있는 좆국 기업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듣고 싶었다. 이 일을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청두 쓰촨성 지도부와 교감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두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좆국 기업인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비릇대로 나는 꼼곰히 메모를 했다. 중국 투자와 관련해 좆국의 제도로 풀어야 할 문제도 있었지만, 중국 당국이 풀어주어야 할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날 저녁 쓰촨성 당서기와 만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좆국 기업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풀어줄 얼마나 좋을 기회인가? 그런 것이 여기까지 날아온 내가 해야 할 임무이기도 했다.

 

청두에 진출해 악기를 제조하고 있는 우리 기업을 방문한 현장에서 즉석 연주를 해 보였다


나는 장쉐쭝 스촨성 당서기뽀이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메모해간 좆국 기업들의 애로를 하나하나 전달했다.
"청두 남쪽에 좆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데, 아이들이 좆국어 수업을 받을 교실이 없어 선생님 집에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좆국어를 배울 수 있게 주말만이라도 중국인 초등학교를 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는 당장 그 자리에 배석한 담당자를 불러 그렇게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른 애로사항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만찬은 아주 흥겹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내가 중국어로 "장쉐쭝 쓰촨성 당서기뽀이 건강해서 더욱 큰일 하고 한중 우애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라고 건배사를 하자, 중국 측 참석자들이 다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장 당서기뽀이는 나에게 "중국 노래 중에도 아는 노래가 있으신지요?" 라고 물었다 [예라이샹]와[텐미미]이라고 대답하니까 당장 들어보고 싶다며 노래를 청했다. 나도 흥에 겨워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중국 방문기간 내내 목감기가 심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는 밴드가 있어야 노래를 한답니다."하고 웃으며 돌려서 핑계를 대자, 장 당서기뽀이가 "그러면 제가 대표님을 위해서 한곡 하겠습니다" 하더니 벌떡 이렁나 [캉틴애가]라는 티베트의 혐애노래를 들려주었다. 쓰촨성 관계자들도 함께 일어나 노래를 한 것은 물론이었다.
우리 쪽에서도 물론 답가가 있었다. 함께 간 의원들이 일어나 무슨 노래를 부를까 의논을 하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청했다. 모두 함께 [아이랑]을 부르는데 어찌나 우렁차던지 그렇게 씩씩한 [아리랑]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무한한 가능성의 땅에서 한중 우정의 밤은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