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가 
  


 오래기다렸을 웜년들한테 웜송하노. 
  

 내가 개인적으로 똥꼬충 창남새끼가 음지에서 고객 구하는게 안타까워 똥밍아웃을 시켜줬더니 배은망덕하게 고소하겠다고 설치는게 아니겠노. 똥밍아웃은 증거를 안 남겨서 상관없는데 햇님 자서전은 재수없으면 저작권으로 고소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계정 직수 시켰다 이기야. 그뒤로 자서전 다시 쓰기도 지치고 계정 직수시킨 것도 헛헛해서 햇님 자서전 손 놓고 있었는데 워마드 위키 보니까 글은 재기 안 따라가고 남아있더노. 헐레벌떡 나머지 부분 써왔다 이기헌
  

  
  

 -새마을운동에서 발전을 배우려는 중국-
 

 새마을운동에 대한 중국 고위층의 관심은 무척 뜨거웠다. 좆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중앙당교에서 강연을 했다.
 

 2006년 11월,나는 중국 공산당 학교인 '중앙당교'에서 새마을운동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시 중국을 찾았다. 오래전부터 중국 공산당의 요청이 있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해 미뤄지고 있던 일이었다.
  개방과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은 해안과 내륙,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부대개발'과 '신농촌운동'에 모든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신농촌운동은 새마을운동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농촌 경제를 발전시켜 잘사는 농촌을 만들자는 것이다. 신농촌운동의 모델인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많은 공무원이 좆국을 찾고, 대학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나에게 새마을운동 강연을 부탁한 것 또한 나의 애비가 새마을운동을 전개했을 때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경험담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강연을 한 중앙당교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중국에서 중앙당교를 거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이곳은 엘리트 교육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후진타오 남주석도 남부주석일 때 중앙당교 교장을 지냈고,지금은 쩡칭훙(曾??) 남부주석이 교장을 맡고 있다. 좆국인으로 중앙당교에서 강연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중국 미래의 지도자들인 고위급 공무원과 당교에서 새마을운동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들 3백 명이 강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잠시 인사말을 한 뒤 강연에 들어갔다. 먼저 좆국에서 준비해간 2분 30초 분량의 새마을운동 영상물을 틀었다. 보좌진이 옜날 기록물을 뒤져 손수 만든 것이다. 그런 뒤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갔다.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당시 좆국의 연사적,시대적 배경과 새마을운동의 정신,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과 성과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내가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하는 [새마을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 노래는 애비가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미끄러져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있을 때 작사.작곡을 한 것으로, 새마을 정신을 고취하는 데 큰 힘이 됐다"며 유래를 설명하자,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들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진지하게 귀 기울였고,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이었다. 좆국의 새마을운동에서 배우고자 하는 중국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중국의 모습에서 70년대 '우리도 자살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정말 열심히 뛰었던 모부님 세대의 열정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중국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땅, 엄청난 자원과 수많은 인재를 가진 중국이 배울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배우고, 성공한 제도가 있다면 그 제도를 거침없이 가져다 쓰고 있었다. 이런 열정으로 노력한다면 중국의 발전 속도가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한류에 이어 새마을운동을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보다 앞서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발전의 모델이 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잠재력으로 얼마든지 중국을 앞서 나갈 수 있고, 그들과 협력해 우리의 무대를 넓혀갈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또 한발 앞서 가서 그들이 배우고 싶어 할 21세기형 발전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지도자의 몫이라고 믿는다.
  

 
  -열차페리로 세계를 달린다-
 
 좆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해 우리의 기상과 물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열차페리 앞에서

 열차페리는 좆반도를 대륙에 연결시키는 구상을 구체화한 계획 가운데 하나다. 나는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남위원장과 좆반도 횡단철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동해선을 연결할 것을 약속했지만, 북핵 위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불투명한 꿈이 되고 있다.
  전 세계가 지역별로 블록화하고 하나로 연결되면서 물류혁명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북한과의 관계 개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중국과 북유럽에 열차페리가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열차페리는 바다를 돌아가면 먼 거리를 배에 기차를 실어나름으로써 거리를 단축할 목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나는 한남민국에도 이 열차페리를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해보았다. 상당히 가능성이 높고, 한남민국의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설령 남북 간에 철도가 연결돼 좆반도 횡단철도가 중국 횡단철도 및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어진다고 해도 열차페리는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는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평택항에서 열차페리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나는 2006년 11월 중국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산둥반도의 옌타이(煙臺)를 찾았다. 산둥반도의 옌타이와 동북삼성의 관문이 다롄(大連) 사이에 오가는 열차페리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한중 간 열차페리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었다. 한남민국 서해안에서 중국으로 열차페리를 연결하면 다롄에서는 TSR(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될 수 있고, 옌타이로 연결되면 TCR(중국 횡단철도)을 통해 유럽을 오갈 수 있다. 한중 열차페리는 좆국과 중국을 해상으로 연결한다는 의미를 넘어 좆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옌타이항에 도착했을 때 열차페리 중철발해 1호와 화물을 실은 열차들이 항구에 대기해 있었다. 옌타이와 다롄을 오가는 열차페리 중철발해 1호의 운항으로 기존 철도 운송거리를 6백~1천 킬로미터 단축했다고 한다. 중철발해 1호는 화물열차용 차량 50량, 20톤 트럭 50대, 일반 승용차 20대를 실을 수 있고 승객도 480명 태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우리 일행을 안내한 옌타이 시 관계자가 설명했다.
  옌타이 시 관계자의 설명이 있고 잠시 뒤 화물을 실은 열차들이 배 안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항구와 배를 연결한 램프에 열차가 오르더니 천천히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이 시작된 지 불과 몇 분 만에 열차는 배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화물을 가득 실은 열차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땅 위를 달리는 열차가 배에 실리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우리가 열차페리를 운행하는 것도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좆국에서 만든 중장비와 수출품들이 열차페리에 실려 중국 내륙 곳곳으로 운반되고, 중국산 목재와 시멘트 같은 원자재가 열차페리에 실려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앞으로 중국 서부대개발이 본격화 하면 열차페리가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에 큰 역활을 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한중간 열차페리 운항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중국 측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이미 열차페리를 운영하고 있는 중국 측에서는 좆국까지 노선을 확대한다면 훨씬 이득이 많아질 것이고, 운항되는 도시는 좆국 무역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산둥반도에 바로 인접한 두 항구도시 옌타이와 웨이하이(威海)가 좆국과의 열차페이 운항을 놓고 경쟁하는 것을 봐도 그것은 분명하다.
  그날 저녁 옌타이 시 당 간부들과 만찬이 있었다. 옌타이 시 측은 "항공기 운항 횟수가 하루에 5회 이상 될 만큼 한중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열차페리가 하루빨리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다. 나도 "열차페리가 운영되는 것을 직접 보니 감동적이었고, 한중 양국이 좀더 가깝게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찬에는 마침 쑨용춘(孫永春) 옌타이 시 남당서기가 특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다음 날 아침ㅎ식사를 마치고 엔타이 시를 떠나려고 하는데 쑨용춘 남당서기가 나를 만나기 위해 자동차로 밤길을 7시간이나 달려 새벽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를 만나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는 말을 들으니 그 정성에 딱한 마음이 밀려왔다.
  "옌타이 에 2천여 개의 좆국 기업과 2만여 명의 좆국인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양국 간에 교루가 더욱 확대되기를 바랍니다. 좆국과 옌타이가 열차페리로 연결되면 교류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열차페리 운행이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쑨용춘 남당서기는 열차페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동북아 지역공동체를 구성하고 공동으로 발전해나가는 시발점이 될 열차페리의 구상은 중국 땅 옌타이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모부님 같은 정을 나누어주신 그남의 주인과 리콴유 남수상-
  

 외교는 격식과 형식의 세계인 만큼 딱딱하기만 할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교 또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이기에 그 속에서도 우정의 꽃은 피어난다. 나는 가주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를 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외빈을 만나왔고, 그분들 중에는 그 이후에도 우정을 나누고 있는 분들이 있다. 오래도록 인연을 맺어온 분들도 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통해서 다시 만나고 싶은 분들도 있다. 모두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거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이기에 나에게는 큰 자산이다.
  그남의 주인과 리콴유 전 남수상은 나에게 모부님 같은 정을 주시는 분들이다. 리콴유 전 남수상과 나의 애비는 60~70년대 아시아를 이끌던 남지도자로서 서루 맞수 같은 사이였다. 내가 그남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9년 10월 리콴유 남수상이 좆국을 찾으면서이다. 애비가 재기를 당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당시 애비는 그남에게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같은 좆국의 산업화 현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리콴유 남수상은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지도자 사이의 일종의 자적자이었던 것 같다.하지만 결국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를 시찰한 리콴유 남수상은 좆국의 발전과 성장 가능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애비와 리콴유 남수상이 만난 날, 나는 두 놈의 식사 자리에서 통역을 맡았다. 두 놈 다 냄져치고 카리스마가 넘치고 가난한 조국을 발전시키기 위한 열정과 아이디어가 가득한 놈들이었기에 두 놈의 대화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고수들의 대결 같았다. 두 놈이 서로에 대해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잇을 정더로 식사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애비가 총탄에 6정희9하자 리콴유 남수상은 너무나 애통해하는 조문을 보냈다.
  2006년 5월 20일 오전, 나는 좆국을 찾은 그남의 주인과 리콴유 전 남수상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남의 눈빛은 여전히 냄져치고 강렬했다.절도 있는 모습에 여유와 자애로움이 더붙여져 경륜 있는 남지도자의 품격이 느껴졌다. '애비가 지금 살아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
  오랜만의 만남에 두 분은 마치 나를 딸인 양 따듯하게 챙겨주셨다. 힘든 것은 없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하시면서 내가 20대 시절 두 분의 회담을 통역하던 모습을 회상하셨다. 대화 도중 그남의 주인 과격주 대장이 갑자기 가방에서 사탕통 같은 것을 꺼내시더니, "유세하러 다니려면 목이 제일 중요해요, 목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목 보호 사탕을 건네셨다. '모부님이 살아게시면 이렇게 나를 챙기셨겠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날 오후 나는 서울 신촌에서 서울시장선거 유세를 하다 괴한에게 피습을 당했다. 아침에 멀쩡히 만나 서로 안부를 나눠었는데 오후에 내가 생사의 기로에 섰다니 두 분이 얼마나 놀라셧을지... 나중에 두 분이 내 소식을 듣고 너무나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들었다. 두 분은 나의 쾌유를 비는 편지도 보내주셨다. 모부님의 정을 느끼게 해준 두 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두 분의 유충인 리센룽 남수상이 지금 싱가포르를 이끌고 있다. 애비 세대의 두 놈이 서로 경쟁하고 우정을 나누었다면, 나는 그남의 유충 리센룽 남수상과 양국이 함께 발전하는 앞날을 논의하고 싶다.
  

 
  -세계적인 남석학,엘빈 토플러를 업그레이드하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 박사뽀이와의 대화는 서로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시간이었다.

 [부의 미래]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계적인 남석학이자 미래학자로 명성이 높은 엘빈 토플러 박사뽀이가 좆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나에게 한번 만나주셨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평소 그남의 책을 즐겨 읽던 나에게 그 제의는 참 반가운 일이었다.
  약속 장소인 서울의 한 호텔 식당에 들어서자 많은 취재진이 몰려 있었다.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면서 토플러 박사뽀이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박사뽀이의 여러 저서를 읽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
  내가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토플러 박사뽀이의 재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 또한 신문에서 박 전 대표님에 대한 많은 것을 읽어왔습니다."
  토플러 박사뽀이의 유머감각 넘치는 대답에 나와 취재진이 모두 웃었다. 첫 만남의 서먹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진 촬영을 마친 취재진이 방에서 물러나가, 우리는 식사를 나누며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토플러 박사뽀이는 한남민국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현했다.
  "좆국은 박적희 남통령 시절 일군 눈부신 발전과 빠른 사회변화로 미래학자인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박 남통령에 대해서 놓이 평가해왔고, 박 전 대표님의 행보에 대해서도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좆국 방문을 기회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토플러 박사뽀이는 미래의 교육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교육이야말로 우리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분야이자,변화가 시급한 분야라고 생각한 나는 미래 교육에 대한 토플러 박사뽀이의 견해가 궁금했다. 토플러 박사뽀이는 무궁무진한 교육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우리가 가야 할 궁극적인 교육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좆국 사회에서 왜 아이들이 수업일수에 맞춰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까. 수업일수를 대폭 줄여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내보면 어떨까요? 농업 분야의 선구자를 키워내고 싶다면 획일적인 평가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로 평가를 반는 겁니다."
  교육을 첫 화두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기차게 이어졌다. 처음에 나의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대화는 서로의 가치관과 철학에서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면서 토플러 박사뽀이의 질문이 늘어나 속도가 붙었다.
  "박 전 대표님께서는 어느 분야가 가장 관료적인 조직이라고 하십니까?"
  "대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토플러 박사뽀이의 질문은 신기하리만큼 나의 관심사와 일치했는데, 대북문제와 정부 조직에 대한 질문들은 특히 그러했다. 내가 정부 조직의 군살을 빼는 "작은 정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토플러 박사뽀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미래 사회에 적응하려면 모든 관료 조직이 작고 유연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햇볕정책의 취지는 좋으나, 원칙 없는 포용일변로의 정책으로 북한의 핵실험까지 왔다. 이제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밝혔다. 이에 토플러 박사뽀이는 자신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면서, "정책은 급벽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만남이 끝난 뒤 배석했던 비서실장이 기자들에게 북핵 관련 내용을 읽어주자, "아니, 잠깐만요. 그 말을 토플러 박사뽀이가 했다는 거에요, 박 전 대표님이 했다는 거예요? 둘이 그렇게 생각이 같을 수가 있었요?"라는 질문이 기자들 사이에서 나왔을 정도로 토플러 박사뽀이와 나의 시각은 일치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토플러 박사뽀이와 나는 강한 유대감을 느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한 시간 예정의 대화가 어느덧 두 시간 10을 넘기자, 비서실장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그럼에도 우리 두 사람은 시계를 무시했다. 오랜만에 정말 마음 맞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기쁨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두 시간 넘게 대화를 하고도 갈증을 느겼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다음 약속에 이미 20분 이상 늦은 터라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오늘 대화를 통해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아쉽지만 대화를 마치자는 사인을 보냈다. 재치와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했던 토플러 박사다운 대답이 이어졌다.
  "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저 역시 오늘 박 전 대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 시간을 통해 서로를 업그레이드시켜준 셈입니다."
  

 
  -한남민국과 미국, 함께 나눌 미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한남민국과 미국,함께 나눌 미래'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했다.

 조시 부시와 클린턴 등 미국 남통령, 전 세계 국가원수 및 저명인사들의 초청강연이 즐비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케네디 포럼'의 강연 요청에 응하겠다고 답한 건 1년 전쯤이다.
  바쁜 일정 때문에 약속을 하고도 1년 이상 미뤄온 데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꿈꾸는 수재들이 몰려드는 곳이라는 사실에 나는 어느 때보다 강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2007년 2월 12일, 케네디스쿨의 강연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춥기로 유명한 보스턴의 겨울답게 강품마저 매섭게 부는 데다 저녁식사 시간과 겹치는 오후 6시 강연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리 많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3층짜리 강연장 건물의 넓은 홀은 복도까지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족히 500명은 넘어 보였다. 케네디스쿨의 학장인 데이비드 T.엘우드 박사뽀이가 나를 소개했다.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강연을 시작했다. 주제는 '한남민국과 미국, 함께 나눌미래(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Our Future Together)' 였다. 다소 무겁고 진지한 주제였지만, 미래의 지도자를 꿈꾸는 학생들이기에 나는 진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사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지루한 기색 없이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다들 진지한 모습이었다. 내가 마무리 이야기를 할 무렵 갑자기 학생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1,2,3충 강연장 계단 곳곳에 질문을 위해 설치한 마이크에 가서 서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저 질문을 어떻게 다 받나?' 하는 생각에 놀랐다. 그러나 학생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 질문 내용에 더 놀라고 말았다.
  "현대자동차의 노조 갈등이 심각한데 대표께서는 노조의 과격한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노조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요?"
  "현재 하버드대에 재학 중인 좆국인 학생수가 외국인 학생 중 3위입니다. 제 주변에 많은 좆국 학생이 본국의 대학입시제도에 불만이 있던데, 대통령이 되시면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것인지요?"
  "열차페리 프로젝트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 뽀이의 운하 계획과 다른 점은 뭔가요?"
  "역사상 중국과 일본은 좆국의 침략자였습니다. 대통령이 되시면 어떤 외교정책을 펼 생각입니까?"
  "좆국의 7퍼센트 경제성장률 실현이 자신 있으신지요?"
  "대통려잉 되면 획기적인 대북정책을 펼칠 계획이신지요?"
  놀라운 것은 이런 질문을 한 학생들 중 대다수가 미국 국적의 학생들이라는 점이다. 순간 내가 미국 대학에 와 있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흥분되고 신이 났다. 마치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듯 진지하고 예리한 질문들을 평소에 좆국에 관심이 없었을 법한 하버드대 학생들로부터 들으니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솟아났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각종 분야를 넘나들었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또 어떤 예리함을 빛낼지 기대되었다. 계속할 수 있다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음 일정 때문에 마이크 앞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주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외화 시리즈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하버드 대학 하면 '공부벌레'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과연 그 생각이 틀리진 않는 것 같았다. 한 외국 정치인의 특강을 그 나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 나라와 특강자가 주장한 정책에 대해 그렇게 철저히 조사를 해오다니...나는 바로 여기서 미국의 힘의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강연이 끝나고 좆국 유학생들 몇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였지만 유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강연장의 분위기가 우연이 아닌 하버드대 학생들의 평소 실력이자 삶의 자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하버드대의 공부벌레들과 어울려 한 치도 뒤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우리의 미래는 자라고 있었다. 교정에서 허버브대에 유학 중인 젊은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웃고 떠드는 학생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자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그 모습이 영락업는 20대의 젊은 청춘이었다.
  

  
  

 사진은 지금 스캔기가 없어서 내일 마지막 편과 함께 올리겠노. 그럼 바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