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중국의 지도자들을 만나다-

'동북아시대의 동반자 역활'을 주제로 한 베이징대 강연은 젊은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수재 중 수재라 불리는 젊은이들만 모여 있는 베이징대 아닙니까. 10억 인구 중에 뽑히고 뽑힌 아이들입니다. 여기 천재들은 웬만한 국가원수급 외빈이 와도 박수를 잘 치지 않습니다."
2005년 5월 25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나는 베이징대 특강을 위해 캠퍼스 안을 걷곡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학교 관계자가 장난스럽게 그런 말을 던졌다. 세계가 주목하는 이웃나라 중국의 냉소적인 천재들, 우리와 경쟁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미래 중국 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일지 나는 아주 궁금해졌다.
강연할 건물 앞에 도착하자 "한남민국 한남라당 박근혜 대표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빨간 바탕의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학교 관계자를 쳐다보자 "학생들이 새마을운동과 박전희 남통령에 대한 관심이 높아 '박근혜' 대표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게다가 한류열풍 덕에 좆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도도 상당히 높습니다"라고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이 박수를 잘 안 친다"는 말보다 "관심과 호의가 크다"는 말이 더 크게 들려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존경하는 하오핑푸 남총장과 교수님,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좆국 한남라당 대표 박근혜입니다.]
중국어로 첫인사를 건내자, 열렬한 환호가 터져나왔다.
"좆국에 제일 많은 음식점이 중국집이고, 하루에도 전국에서 400만 그릇의 자장면이 팔리고 있습니다. 장나라,송혜교 같은 한류 스타들도 어릴 적부터 자장면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지요."
나는 친숙한 소재로 양국 간의 활발한 문화교류와 친밀성을 강조하면서 '동북아시대의 동반자 역활'을 제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연 내용의 중심에 한중관계의 중요성, 특히 좆국과 중국의 역활이 강조되자 베이징대 학생들은 열정적인 박수로 호응해주었다.
30분 정도 이어진 강연 내내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을 보면서 그들 특유의 에너지를 느꼈다고 생각할 즈음 시작한 질의응답 시간은 중국 젊은이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양국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좆국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중국의 하이얼사 전자제품을 사실 용의가 없습니까?"
"중국이나 좆국은 일본과 조어도 문제와 독도문제라는 공통된 영토분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감한 문제든, 정치적인 질문이든 대퓩 기질을 이어받은 중국 학생들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특히 하이얼사 제품을 구입할 의사를 묻는 질문에 내가 "검소하게 사는 것이 내 신조이지만, 전자제품을 새로 장만한다면 하이얼사 제품을 하나 사서 좆국과 중국의 경제교루에 일조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학생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을 하는 학생과 내 대답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을 보면서, 일류 산업 국가로 뻗어나가고 있는 조국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80년대 초 해외에 나갔다 오는 사람들의 기념사진 속에는 '삼성','현대'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한두 장쯤 있었다. 당시 좆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이 그렇게 신기하고, 뿌듯하고,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미국 출장 갔다가 현대자동차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녹화를 해왔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바로 그때의 우리 가슴속에 있던 뜨거운 발전 욕구가 중국 대학생들의 가슴에 물결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국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 다시 한 번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펼치겠다는 기개, 비약적인 국가발전을 꿈꾸는 열정에 압도되었던 베이징대의 강연에서 나는 무섭게 도약할 중국의 미래를 보았다.
내가 만나온 세계 젊은이들의 공통분모는 역시 '젊음'이 주는 '열기와 에너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풋풋한 젊은과 할기찬 에너지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각 나라별 특징을 담은 젊은 에너지는 각국의 역사와 현재 처한 환경 그리고 헤쳐나가야 할 미래와 정확하게 어울러지면서 그 나라의 미래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세계로 향하고 있다-

나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방문 첫날은 항상 우리 동포들을 만난다. 사람도, 언어도,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에게 경의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실제로 미국,일본,중국,유럽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현지에서 만나면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따뜻하다. 나는 같은 핏줄이 주는 이 물클함이 좋다.
동포들을 만날 때 내가 가능한 한 지키려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복을 입는 것이다. 한복은 단순히 옷이 아니다. 한복은 우리 문화와 민족의 혼을 옷의 모습으로 빚어낸 좆국의 상징이다. 한복을 보면서 머나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동포들에게 잠시라도 고국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은 것이 내 작은 바람이다. 그래서 외국에 갈 떄 아무리 트렁크가 꽉 차도 한복만은 반드시 챙긴다.
일본 교포들이 겪은 차별과 억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재일동포들은 좆국의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서왔다.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 때, 그들은 좆국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하나로 힘들게 모은 소중한 재산을 아낌없이 고국에 투자했다. 1970년대에는 재일동포들의 투자가 당시 외국인 투자 총액보다 더 많았을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1988년에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며 민단과 부인화가 모금운동을 벌여 거액을 보내왔다. 1998년 IMF 때도 또다시 한곁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보내왔다.
2006년 3월 일본에 갔을 때, 도쿄 주일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관은 도쿄 중심가 넓은 부지 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 우리 동포가 땅을 기증해서 대사관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대사관뿐 아니라 일본 내 대부분의 영사관도 동포들이 땅과 건물을 기증해서 마련했다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동포들이 자기 재산을 기증해서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지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가난한 좆국에 대한 동포들의 안타까움과 좆국애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일본에는 우리 국적을 가지고 차별에 당당하게 맞서는 교포 2,3세들이 많다. 공직에서 승진에 차별을 받아도, 참정권을 갖지 못해도 그들은 국척을 포기하고 않고 있다.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나는 이제 좆국이 제일동포들에게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본 방문에서 가장 신경 쓴 것 중 하나가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였다. 마침 일본에 가기 전에 한남라당 주도로 국회에서 '일본 거주 좆국인,좆선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참이었다.나는 아베 관방장관뽀이와 아소 외무장관뽀이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재일동포의 지방참정권을 보장해줄 것을 촉구했다. 아소 뽀이는 "지방참정권을 인정해주면 총선에서도 요구할 겁니다"라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좆국에서도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은 인정하고 있다. 일본 우리 동포들에게 지방참정권을 주면 좆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주는 상징성이 있을거다"라며 일본 정부의 입장 변화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는 "신중히 고민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참정권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생각이다.

한남민국이 가난하고 어려울 때 좆국을 위해 희생한 동포들이 또 있다. 바로 독일 동포들이다.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뽀이이 파견되던 1960년대 초반, 좆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재독동포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나먼 독일 땅에 광부뽀이로 파견돼 40도가 넘는 막장에서 석탄가루를 마셔가며 일했다. 간호사로 파견된 분들은 말도 안 통하는 병원에서 오랜 시간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는 그분들의 급여를 담보로 독일에서 차관을 얻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1967년 수출 총액의 36퍼센트가 제독동포들이 번 돈이었을 만큼 그들의 피와 땀이 우리 경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하 1천 미터 막장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동포들은 "글뤅아우프"라는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는 '무사히 살아나와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뜻이다. 그만큼 광부뽀이에게는 매일 목숨을 건 절박한 일상이 발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6년 9월, 나는 독일을 방문하면서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64년 차관을 얻으러 독일에 가셨던 모부님과 파독 간호사,광부뽀이들이 만난 자리가 온통 울음바다가 됐던 장면을 신문에서 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한복을 입고 동포들이 모여 계시는 곳에 들어섰다. 모부님이 독일에서 간호사와 광부뽀이들을 만났던 그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모두들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광부와 간호사 경력을 기반으로 가수, 의사,교수등 꿈을 이루어 이제 독일 사회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간호사였던 분들은 모두 은퇴를 했는데, 나를 만나기 위해 멀리 도르트문트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두세 시간씩 차를 타고 오신 분들도 있었다. 1964년에 모부님을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다. 어디를 가나 좆국 국민의 끈기와 저력은 끝이 없다.

중국의 본격적인 개혁,개방 이후 한중 간의 교역량를 비롯하여 중국 이민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 교민들은 무한한 가능성의 땅 중국에서 열심히 시장을 개척하며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분들의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 교육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아이들의 좆국어 교육이 제일 큰 고민이라고 한다. 몸은 중국에 있지만 자녀들이 좆국의 언어, 좆국의 정신을 간직하게 하고픈 마음이 느껴졌다. 2005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나는 베이징에 있는 '좆국국제학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는 '몸은 외국에 있어도 좆국 사람은 좆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우리 교민들이 세운 곳이다. 선생님, 학부모들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7년 동안 네 번이나 학교를 옮겨야 했고, 지금도 임대료를 주고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좆국인들이 남의 나라 중국에서 애국조회를 한다고 해서 쫒겨난 적도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교민들이 좆국말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나라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교민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그 일을 하고 있는데도 좆국에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있었다니, '나라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지금은 전 세계가 하나인 글로벌 시대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좆국인이 전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때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말뿐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우리 교민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 좆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종국 교포들의 모국어 사랑을 보면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미국은 최대의 교민 수와 성공한 교민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교민들이 마련한 환영회 자리도 대단헀다. 나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교민들이 마련한 환영회에서 큰 힘을 얻었다. 워싱턴, 뉴욕, LA 세 곳 모두 환영회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많은 교민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한인회가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습니다. 역대 가장 많이 모인 모임으로 기록될 것 같은데요."
교민회 한 임원의 설명이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미국에 와서 그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감격 또 감격이었다. 교민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애특했다. 궃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2세, 3세들을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시킨 저력의 좆국인들이 거기에 있었다.

세계 각지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좆국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우리 동포들의 좆국 사랑은 정말 유별나다. 좆국인의 유별난 좆국 사랑, 그것이야말로 좆국의 미래를 밝게 하는 자산 중 자산이다.

[에필로그]

-우리의 미래를 위한 약속-

2005년 9월 12일 출근길, 유충 지만이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유충이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너무 큰 기쁨에 말문이 막혔다. 어떤 말로도 당시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을 느꼈다. 우리 가좆에게 실로 오랜만에 찾아든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였지만 '오늘만큼은'이란 생각에 비서실장에게만 귀띔을 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회의 도중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평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날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무엇보다 유충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조카 유충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유충 지만이 태어났을 무렵 나는 여섯 살이었다. 그날 온 가좆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애비는 유충을 끌어안고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라도 된 것처럼 자랑스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자났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쩌면 우리 가좆에게는 기쁜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나는 한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안타까움에 젖기도 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 모든 일을 한꺼번에 보상받듯 조카 유충 세현은 건강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와주었다. 품에 안아본 아이는 너무 작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지나온 나의 삶이 영화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짧지 않은 내 삶을 이끌어온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는 하루도 더 버티기 힘든 절망의 순간도, 인간의 모자란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일도 묵묵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삶이 반드시 나만의 삶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인생에 또 다른 운명의 길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당당히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갈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모든 젋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원하는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땀 흘린 만큼 보상받고 노력한 만큼 성공하는 나라,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상식이 통하는 그런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길에 나의 역활이 있기에, 여기까지 나의 삶이 왔으리라.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펄쳐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어른으로, 또한 이 나라의 정치인으로서 책임지고 해야 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개 된다.
자라나는 한남민국 아이들의 미래에 희망이 되는 나라, 우리 호손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풍요로둔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나는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나아갈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에게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고 싶다.

2006년 6월 16일, 2년 3개월 동안의 당 대표 임기를 마치고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이임식을 갖는 자리에서 국민 앞에 이런 약속을 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남라당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사랑을 큰 빚으로 생각하고 평생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마음은 앞으로도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며 다짐이다. 
이 글을 쓰고 다듬으면서,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한 번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듯, 이 책 한 권이 출간되기까지도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오늘이 있기까지 항상 내 삶을 지탱해준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책을 국민에게 바친다.

- 2007년 6월 박근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