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womadic/g5PJ/1611

 



 

 

한국의 20대 여성들은 죽고 싶다.

 

2008년은 2000년 이후로 점점 상승해 오던 한국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남성의 자살률을 처음 앞지른 해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모든 연령대에서 남성 자살자는 여성의 자살률을 2배가량 앞지르는 것이 상례인 것에 비춰 볼 때, 20대 한국여성들이 겪은 사회적 좌절의 크기를 감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여배우는 20대 여성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처절한 과정을 우리에게 낱낱이 보여 주었다. 배우이고 싶었으나 창녀가 되지 않는 한 배우도 될 수 없다고 강요하는 이 마초들의 정글에서, 자신의 일그러진 자존감을 회복할 길 없어 죽음을 선택하는 이 사람의 슬픈 삶. 그녀의 죽음이 고발한 사건에서 아무런 위법 사실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검참의 천연덕스런 수사 결과 발표는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수난과 굴욕을 그대들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으로 선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앞뒤로 꽉 막혀 있는 조건에서 교대에 가지도, 고시나 공무원시험에 패스하지도 못하고, 기업 대졸사원 입사시험에서 어찌된 일인지 번번이 낙방한 여자들 중에, 대학을 나와 차마 봉급 100만 원의 저렴한 직장에서 혹사당하느니 취직 대신 육아와 가사의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결정하는 여성들이 늘어난다.

‘취집’을 선택하는 여자와 그 여자와 기꺼이 결혼하는 남자가 서로 주고받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도 생존이 먼저 보장될 때 싹트는 법이니, 젊은 여자가 대학만 나와 가뿐하게 홀로 서는 불상사가 결코 없도록 전 방위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이 사회에서 그 여자의 선택은 오직 사랑에만 기반한 것이라곤 말할 수 없다.

우린 종종 고의인 듯 노출되는 결혼정보회사의 신랑, 신부 등급표를 접할 기회가 있다.

여자의 미모와 젋음, 그녀의 집안이 갖는 재정능력은 남자의 직업, 남자가 앞으로 맺게 될 사회적 인맥의 얼개를 구성하는 학벌과 대등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이 고통스런 생존 조건에 ‘저항’ 하기보다, ‘적응’하는 여성들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세상엔 언제나 저항보다 적응을 택하는 사람이 많은 법이니. 여성이 술과 더불어 남성들이 소비하는 최고의 품목이 된 시대에 더 값비싼 상품으로 매겨지기 위한 경쟁에 여성들은 몰입한다. 20대 중후반 여성의 60%는 성형수술 경험이 있으며 여성 10명 중 7명은 외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한 박사논문을 통해 나온 바 있다.(2010년)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삶이 찌그러져 가고 있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그 가면을 열심히 치장하는 데 몰두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 이들에게 훼손된 삶은 소비로 보상된다.

 

이들의 의식은 점점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맞춰진다. 파리에 잠깐 휴가를 즐기러 왔던 소위 진보적으로 분류되는 한 여성이 “파리 물가가 너무 비싸서 아무것도 함부로 못 사겠어. 쇼핑을 못 하니까 답답해. 숨이 막혀.”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조심스럽게 감지하던 “소비가 존재를 입증해 주는” 작금의 한국에서의 현상을 그녀의 한마디가 선언처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은 사이트에서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알게 되었다는 처연한 증언이 올라오면, 그 비극을 겪었거나, 언제 겪을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여성 동지들은 남편의 신용카드를 들고 나가 그동안 알뜰 살림하느라고 망설였던 ‘명품백’부터 하나 지르라고 충동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는 아이에게 물려주는 알사탕처럼, 남편에게 배신당한 가정주부의 공허를 위로해주는 최고의 보상인 듯하다.

남자는 술과 하룻밤 자신을 파는 여자를, 여자는 명품백을 부여안고 위로를 구하는 이 소통불능의 시대. 공허가 서로의 가슴을 치는 고독한 시대를 우린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소비하는 사회

 

룸살롱과 여성의 사회진출

2010년 3월 8일, 기획재정부 윤증현 장관은 한국경제 설명을 위한 외신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마침 그날이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것이 시끄러운 스캔들의 전조였을까.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사회참여도와 저 낮은 평등지수에서 헤어날 길 없는 한국여성들을 한국경제와 연결시키며 <윌스트리트저널>의 기자가 운을 뗐다.

“한국여성의 사회 참여가 저조한 것은 룸살롱 등 잘못된 직장 회식문화 때문 아닌가?”에 이어서 “기업체 직원들이 재정부 직원들을 룸살롱에 데려가는 걸로 아는데 이에 대한 기준이 있나?”라고도 물었다. 이 기자뿐 아니라 CBS라디오의 기자도 “룸살롱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게 대기업 인사들인데 이런 대기업들에 대한 세금 감면 등의 접대비 허용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하지 않느냐.”며 접대문화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동방예의지국의 장관답게 윤증현 장관은 당연히 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을 점잖은 말로 피해 갔다. ‘재정부 직원들은 룸살롱 접대를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한국처럼 여성의 위상이 높은 나라도 없으며, 여성 사회참여가 하도 활발하여 저출산이란 사회문제를 야기할 정도라고.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거’라고.....

간담회 후, 재정부 직원이 “어떻게 일국의 장관에게 룸살롱, 접대와 같은 부적절한 어휘를 건넬 수 있느냐.”며 기자의 예의 바르지 못한 질문에 분노를 표하자, 기자는 “왜 당신이 질문이 적절한지 안 한지를 판단하는가”하며 항의했다. 기획재정부에서는 기자의 무례를 용서치 않겠다면서 <윌스트리트저널>에 대한 공보서비스를 전면 중단하고, <윌스트리트저널>본사에도 정부 차원의 항의서한을 보낼 계획임을 밝혔다. 한국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 사건을 ‘외국기자의 한국 멸시 발언’ 내지는 ‘황당, 부적절 발언’으로 사건을 호도하며, ‘국민 자존심에 상처를 준 기자’라는 식으로 국가적 자존심을 공연히 걸고 넘어졌다.

그러면서 기획재정부의 항의가 당당한 ‘국격 지키기’라도 되는 듯 지지를 표했다.

네티즌들은 ‘한국여자들이 모조리 룸살롱에서 일하기 때문에, 사회 다른 부분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거냐. 한국여자에 대한 모욕이다. 여성단체들 항의해야 한다.’ 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봉창을 두드렸다. 그나마 사건은 제대로 언론을 통해 다뤄지지 않고, 며칠 뒤 대부분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이 사건을 다룬 기사가 모조리 삭제됐다.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관기발언으로 본색을 드러내던 현직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마사지걸 고르는 지혜를 설파하고, 집권당의 국회의원은 자기 지역구의 화끈한 밤문화를 자랑하는 나라. 80년대 학생운동 시절 장을 맡았던 사내들이 드디어 정치판에서 한몫을 잡고 386이라는 정치세력을 구성하여, 그들의 성지인 광주 5.18묘역을 참배한 후 들른 곳도 여자들을 끼고 앉아 술을 받는 곳인 그런 나라에서, 외국기자가 장관에게 그 요상한 접대문화에 대해 질문 좀 했기로, 누구의 기준에서 부적절하단 말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술집에서 여자들을 끼고 노는 것은 이 나라 남자들 최대의 오락이었다. 그러나 19세기까지 어지간한 선비들은 시도 짓고, 글도 쓰고, 사군자도 치면서 삶의 은유가 우리 일생의 언저리에 머물게 할 줄도 알았다. 그러면서 여인의 치마폭에도 안겼던 것이다. 거친 파도에 휘말린 돛단배처럼 우리의 운명이 끊임없는 격랑에 휘둘리던 20세기를 휘적휘적 건너오는 동안 우리의 인문학적, 예술적인 삶의 여유는 폭풍이 쓸고 간 폐허처럼 앙상한 흔적만 남겨 높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상륙한 자본주의는 즉물적인 여흥의 욕구만이 수컷들의 삶을 지배하게 했다. 한국남자들이 절대 공유하는 지고의 오락을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란 시각으로 들이대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겠지.

더구나 이렇게 폼 잡고 국가경제라는 중대사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추잡스런 룸살롱을 거론하니 시비 거는 걸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다. 언제나 보여 주는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외국기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외국인들의 눈에도 붉은 네온 십자가와 함께 전국에 빠짐없이 들어차 있는 유흥업소들은 진기한 현대 한국의 현상으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키워드를 제공하는 한 요소이다. 더구나 이 업소들에서 소비되는 국부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기자들 입장에서, 한국경제와 관련한 간담회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한국사회가 장악된 이후,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여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소위 텐프로로 불리는 강남의 유흥업소에선 여대생도 한 달에 천만 원을 쥘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미치도록 치솟기만 하는 등록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라는데, 오히려 그런 곳에 취업할 수 있는 외모를 가진 여성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형국이다.

또 한편엔 남편 월급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아이들의 학원비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활약하는 엄마들도 계시다. 신인 여배우 하나를 돌아가면서 술안주로, 노리개로 삼는 권력을 허리에 차고 있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넘쳐 난다. 이들의 본업은 여대생이고 가정주부이며, 여배우지만, 이들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창녀로 전락시킨다.

지난 10년간 강화된 보육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늘어난 여성 일자리중의 하나는 보육교사이다. 국가부도 사태만큼이나 심각한 사태라고 호들갑을 떨며 대책 마련에 부심인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성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대책은 개선된 보육제도의 마련이다. 그러나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11시간 노동을 하는 이들 보육교사들이 받는 임금은 120만원 안팎이다. 대체 이 일을 하라는 것일까 말라는 것일까? 아니면 모성을 발휘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노느니 한 푼이라도 번다는 심정으로 하라는 것인지.

 

우후죽순으로 전국을 누비는 김밥 한 줄 천 원, 24시간 영업의 선두주자, 처절한 외식업계의 경쟁을 온몸으로 입증해 주는 ‘김밥천국’에서 하루 12시간, 30일 노동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월급은 100만 원 안팎이다. 그 잘난 삼성계열도 아닌 것이, 노조 만들었다고 노동자들을 모조리 해고했던 기륭전자 여직원들이 받던 임금도 64만원이었다.

문제의 기자회견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이 반박의 근거로 내세운 것이 새로 임명된 여자 검사들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검사가 된 것은 비교적 공평하게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선발의 기회를 자신들의 노력으로 차지한 것이지, 이 사회가 그녀들에게 제공한 것이 아니다. 2009년 대학 진학률에서 여성(82.4%)은 남성(81.6%)을 앞섰다. 2008년에는 행정고시51%, 외무고시65.7%, 사법고시38.0% 등, 고난도의 국가고시에서 성별간의 우열은 오히려 여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가까이 가고 있다. 교대는 여성들에 장악된 지 오래되었다. 남성들이 그들의 편견으로 차단할 수 없는, 오로지 실력으로 돌파할 수 있는 모든 직업의 영역에서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파고들었다.

그러나 2099년은 통계가 시작된 이후 대졸 여성의 실업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된 해였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되는 과정 속에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가 여성 노동조건의 심각한 악화였다. 여성의 평균급여는 남성의 61%수준에 불과하다. 기업들은 대졸 여성들에게 노골적으로 일자리의 기회를 닫아 놓기 시작했다. 반면 무한대로 계속 늘어가기만 하는 단 하나의 분야, ‘서비스업’이다. 주 50~70시간 노동에 간신히 100만 원 안팎의 살인적 월급만을 거머쥐지 않는 ‘서비스업’은 몸 파는 것을 겸하는 직업들로 축소된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이 나라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차단하고, 대신 몸을 파는 업종에 대한 수요는 최대한 확대해 놓고 그 속에 미끼를 잔뜩 넣어 둔 채, 여성들이 그 속에 발을 담그기를 기다렸다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그 질척거리는 수렁에 여성들이 발을 디디면, 몸이나 파는 천한 것들이라고 조롱하는 형국인 것이다.


 

동방예의지국 : 스스로를 접대하는 남성카르텔

17~18년 전 국영기업체에서 일할 때, 입사 동기 남자 직원들은 월말이면 오후 내내 가짜 영수증을 구하러 무교동 일대를 해매고 다녔다. 업무추진비를 지출하기 위해 가짜로 서류를 꾸미고, 가짜 영수증을 여기저기서 구해서 그 서류에 증빙으로 첨부하는 일은 상사들 뒷주머니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일뿐 아니라, 2~3차로 이어지는 그들의 긴 회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군대에서 간신한 탈출한 그들은 사회초년생이 되어서, 이 일 같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자존심을 뭉개고 더러운 세상으로 들어간다. 직장이 깃발 없는 군대라는 것을 철저하게 배우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를 익힌다. 그들의 회식에 여성들은 동참하지도, 영수증을 구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대신 남성카르텔에서 주고받는 권력의 배분에서 제외된다.

<윌스트리저널>기자의 질문에 다소의 함축과 비약이 있을지언정 그 질문은 우리 사회의 혼란스런 모습들을 관통하는 해답들을 담고 있다. 남성들은 고객을 필요 이상으로 접대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접대한다. 여성이란 비싼 ‘오락기구’를 소비하면서. 업무관계에 있으면서 돈과 성으로 단단한 연대를 맺은 남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잡힌 빌미와 보여 준 약점, 제공하고 제공받는 달콤한 오락의 공생관계에서 여성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게임의 룰을 만들어 간다. 여성들은 상납되는 장난감일 뿐, 권력을 분배하는 이 공생의 시스템에서 안전하게 배제된다. 그러면서 회사는 종종 한직에 여성 부장,팀장을 만들어 주며, “니들도 열심히 하면 된다.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생색을 낸다.

“거래처에서 술 한 잔 사달하고 하는데, 삼겹살에 소주 사주고 노래방 가면 계약 깨진다! 술 한 잔 사달라고 하는 것은 룸살롱, 아니 최소한 단란주점에 가서 여자 끼고 4인 기준으로 200만 원 정도 선에서 술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나가는 것까지 원하면 추가로 120만 원 정도 더 깨지는 것이고. 특히 공무원 넘들이 제대로 한 잔 강남에서 쏘라고 하면 그건 텐프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접대 받는 넘들 대부분 공무원 아니더냐!”

관련 기사 아래 한 네티즌이 달아 놓았던 댓글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방해하는 요인이라는 주장에서 발끈하긴 하지만, ‘접대’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서로가 파 놓은 추잡한 뇌물의 수렁을 벗어날 수 없는 한국남성들도 이를 곤혹스럽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고3 때 선생님들이 학력고사가 끝나 이제 곧 학교를 떠날 우리들에게 누설해 준 정보에 따르면, 그들도 역시 룸살롱에 간다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선 선생이란 호칭을 잠시 잊고, 서로 박사장, 최사장 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기회만 되면 간다.

룸살롱에 간다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인간들은 진정 취향도 없나.’하는 것이다. 여자랑 성적으로 즐기며 노는 것은 자신의 영혼도 조금은 팔아야 하는 일이다. 몇 시간 동안 한 여자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린다면, 자신의 손도 심장도 같이 접촉하는 수고와 흥분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정상적인 자존감을 가진 남자라면, 아무나 눈앞에 있는 여자와 아무리 돈 안 드는 일이라도 성적 유희를 그것도 집단적으로 즐기려 하진 않는다. 그것을 일종의 성적인 장애에 해당한다고, 성정치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지적한다. 심지어는 거위들도 아무하고나 짝을 짓지는 않는다.

군대 가기 전의 친구를 억지로 사창가에 끌고 가는 관습, 그리고 직장에서 초년생들에게 ‘가라 영수증’을 구하러 다니게 만들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단체로 룸살롱에 가서 함께 여성을 소비하는 관행은, 이 들의 자존감과 취향 따위를 거세시키는 의식과도 같다.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그들이 마음을 다해 영혼을 나누는 사랑을 완성해 갈 가능성은 줄어든다.

 

거부할 수 없이 집요하고 질척한 집단적 성생활의 연대를 맺는 한국남자들. 그들의 습성은 오늘 우리가 겪는 다양한 한국적 비극을 설명해 준다. 여자를 소비하는 남자, 남자에게 소비되는 여자의 관성은 성적으로 여성을 유린하는 일에 대한 집단적 불감증을 남성들에게 심는 듯하다. 일 년 내내 우린 끔찍한 성폭행 사건의 보도에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인구대비 아동성범죄 발생 건수가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고 있다. 특히 최근 4년간 아동 성범죄의 증가율은 69%로 감소하거나 다소 줄어든 다른 선진국들의 경향과는 대조적이다.(여성가족부, 2010년). 아동성폭행을 한 남자들 99%가 법정 형량보다 낮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또래의 소녀를 성폭행한 소년들은 대부분 훈방될 뿐이다. 그러나 성폭력으로 임신하고 출산한 소녀는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남자들의 거대한 공모를 통해 자행되는 악행의 증거가 되는 그녀들은 눈앞에서 치우는 것이 미덕이기 때문이다. 근간 우리가 목격한 모든 연쇄살인은 남자가 여자를 죽인 사건이었다. 그녀들의 성을 유린한 후에.

 

이 정부의 또 다른 과오

기업하기 너무 좋은 나라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기업의 접대비 한도를 2배로 증액하고 접대비 실명제를 폐지했다.(앞선 두 외국기자들의 질문도 이러한 정부의 자발적인 접대문화 확산을 위한 실천에 근거한 것이었다)한국에서 기업을 잘 운영하려면 접대와 뇌물이 기본임을 잘 아는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서였을까? 이후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성산업 제1위국의 명예를 차지한다. 2009년 대졸 여성 실업률은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는 동안, 유흥업계 종사자는 200만에 육박하고 공식적인 산업규모만 연 20조에 이른다.

경찰과 수차례 통화한, 유착관계가 의심되는 강남 유흥업소 한 달 매출이 70억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 현실적인 전체 규모는 20조인지 혹은 그 몇 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 나라 성산업의 규모가 끊임없이 확장된다는 것은 사회의 음지가 더 확대된다는 것,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밝은 곳에서 논의하여 일궈 나갈 수 있는 양지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이 그 음지 말고는 갈 데가 없는 여자들도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학력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여성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들이 주종을 이루며, 오로지 성산업계에서만 여성들에게 넉넉한 임금을 제공한다면, 기꺼이 자기 영혼을 팔아 빵을 사고, 명품을 사고,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 소비할수록 우리의 존재는 축소된다” 는 68혁명의 유명한 슬로건이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현대사회의 소비는 여성을 소비하는 남성의 소비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찾아낸, 자신과 비슷한 빛깔의 영혼을 지닌 여인과 온 심정을 다해 사랑하는 대신,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몸을 파는 여인의 성을 소비하는 남자는 가장 비참하고 어리석은 소비자이기도 하다. 김용철 변호사도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룸살롱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룸살롱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표면적 가치는 역전된다. 조롱되고, 버려진다. 거기서 뿌려지는 돈의 절반만이라도 여성들의 건강한 일자리들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한국사회는 썩어 가는 밑동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남성이 맞이할 불행은 필연적이다. 사회가 함께 가꾸고 누려 가야 할 풍요를 남성카르텔이 그들만의 밤의 병적인 여흥을 위해 커튼 뒤로 감추며, 그들의 동등한 파트너이어야 할 여성을 그들의 소비 품목이나 입주 도우미로 전락시키는 동안 사회는 밑동부터 서서히 썩어 전체를 위협한다.

 

저출산, 명징한 소멸의 징후

생명력이 위협받는 사회의 가장 명징한 징후는 저출산이다. 이대로라면 한국은 300년 뒤에 인구 5만 명으로 줄어든다는 유엔 미래보고서가 나왔다. 생명은 양지에서 먹고 자랄 풍성한 양분이 있는 곳에서 번식한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그 첫 번째 양식이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성들의 왕성한 사회 진출로 저출산 문제가 초래되었다고 말하고, 이 정부의 미래기획위원회는 저출산을 해결할 회심의 카드로 낙태금지를 들고 나섰다. 그들이 그려 내는 공식대로라면, 여성들을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생기는 아이는 무조건 낳으면 된다. 그러면1.15이던 출생률은 2로 올라가고, 저출산은 해결된다? 정책입안자들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해외토픽에 날 만한 발상이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나는 여성들이 직업을 갖기보다 ‘현모양처’ 되길 바란다.”라고 발언함으로써, 이 정권이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분명히 했다.

현 정부가 출산정책에 접근하는 방법은 히틀러가 지배하단 나치 독일이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했던 것을 연상하게 한다. 히틀러의 여성정책은 3R(아이, 교회, 요리)였다. 지배민족의 육성을 꿈꾸었던 나치당은 “수컷 새가 적을 격퇴시키는 동안, 암컷 새는 치장 하고 알을 부화시킨다.”고 말하며, 여성은 단지 아이를 낳는 기계로 간주했다.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성적 존재로서 인정되고 존중받는 여성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이므로, 오직 아이를 생산해 내는 존재로서 남편에게 철저히 종속되도록 하였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것이다.” 라는 이 압도적인 구호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던 독일 공산당에 여성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면서도, 총선에서는 순수한 모성을 주장하는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 줬다. “여성들은 여전히 모성과 성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는 반동적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빌헬름 라이히는 지적하고 있다.

아이는 수태하는 사람이자 1차 양육자인 엄마가 사랑으로 아이를 품을 수 있을 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아이는 출산될 뿐 아니라 사랑으로 양육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들판의 잡초처럼 씨만 뿌려놓으면 비 맞으며 자라는 존재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시도하는 저출산 극복 정책은 일찍이 1960~70년대를 풍비한 루마니아의 전설적 독재자 나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도했던 그것과도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를 늘려야겠다는 결론을 얻고, 모든 여자들에게 아이 5명을 낳을 것과 피임과 낙태를 금지할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전국의 고아원들은 곧 아이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보모 한 명당 80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밤에는 120명의 아이들을 한 보모가 돌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본다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이를 ‘사육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그 어떤 종류의 따뜻한 스킨십도 받지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며 자랐다. 70년대 들어 이 아이들이 대거 서유럽과 북미로 입양되었는데, 입양된 아이들에게서 한결같이 자폐증 혹은 유사 자폐증 증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여성이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저출산의 저주를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낙태를 금지하고, 피임 절차를 방해하는 등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커다란 재앙을 낳을 뿐이다. 미국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은 90년대 미국에서 범죄가 급감한 이유가 10여 년 전 합법화된 낙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안정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이 덜 태어났기 때문에, 범죄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반대로 가정해 보자면,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아이가 많은 사회는 10~20년 내에 감당하기 힘든 또 다른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자본의 지배력이 날로 강화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에서, 여성은 현격한 몰락을 거듭하고 있다. 일터에 나가는 것 자체가 굴욕인 월 100만 원 이하의 일자리들은 여성들의 안타까운 목구멍을 낚아채고, 남자들은 야근과 술, 성매매, 야동에 빠져 있다. 교육 환경은 지옥이고, 아이들을 향한 성범죄는 급증한다. 비정규직 계약서에 발목 잡힌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불안에 장악된 영혼들이다. 내 삶이 한껏 발을 뻗고 꿈을 펼칠 곳이 없는데, 연애도 작동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떤 어미가 또 다른 생명을 세상에 내놓고 싶겠는가? 상위 10%든 나머지 90%든 자본이 아무리 완충장치 없이 찍어 내리는 압력에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버텨내는 것이 이명박 치하의 우리 삶이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유전자들은 움츠리고 잠복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목수정-'야성의 사랑학'에서 발췌-